'오십프로'를 보다가 멈칫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북한 최고의 특수 공작원이 바다에 빠진 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작은 섬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이 드라마에서 워낙 자주 쓰이다 보니 그냥 넘겼는데, 이번엔 이게 현실에서도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봉제순이라는 캐릭터, 어떤 설정인가
오정세가 연기하는 봉제순은 코드네임 '불개'로 불리던 북한 인민무력부 특수 공작원입니다. 택견과 위장 잠입에 뛰어난 인물로, 기밀 문서를 회수하러 여객선에 잠입했다가 격전 끝에 바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합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영선도에 떠밀려 온 그는, 지금은 기억을 잃고 영선스틸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두 가지입니다.
- 자신의 신원, 과거 직업, 훈련된 기술 — 이 모든 '자전적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
- 그러면서도 몸놀림은 여전히 비범하다
이 조합이 현실에서 가능한지를 따져보려면, 기억이 실제로 어떻게 지워지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기억상실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뇌가 물리적으로 손상돼서 생기는 기질성 기억상실과, 심리적 충격이 원인이 되는 해리성 기억상실입니다.
기질성 기억상실은 교통사고나 뇌졸중처럼 뇌 조직 자체에 손상이 생겼을 때 나타납니다. 봉제순처럼 바다에 빠졌다면 익수로 인한 뇌 손상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기억 외에 다른 인지 기능도 함께 손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해리성 기억상실은 다릅니다. 뇌에 구조적 문제가 없어도 극심한 스트레스나 심리적 외상이 기억을 차단시키는 겁니다. 연세대 의과대학 자료에 따르면,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는 사람은 "언어, 학습 능력과 같은 정보의 회상 능력이나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는 능력에는 손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자전적 기억만 선택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봉제순 설정과 가장 가까운 케이스예요.
드라마 속 '전신 기억상실' 클리셰, 현실에선 얼마나 드문가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사고 이후 자기 이름도, 얼굴도, 감정도 모두 사라진 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십프로'의 봉제순도 그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현실에서 이 정도의 전반적 기억상실은 매우 드뭅니다. 실제 임상에서 더 흔하게 나타나는 건 선택적 기억상실이나 국소적 기억상실입니다.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만 사라지거나, 특정 시기만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해리성 기억상실에는 '해리성 둔주(dissociative fugue)'라는 하위 유형이 있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자료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A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B로 살아가다가 갑자기 둔주에서 깨어나 B로 살았던 기억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자신의 정체성 전체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사는 케이스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봉제순의 설정이 아주 터무니없는 건 아닌 셈입니다.
단, 몸에 배인 신체 기억 — 격투 능력, 잠입 기술 같은 절차 기억 — 은 자전적 기억과 저장 경로 자체가 다릅니다. 이 부분은 드라마가 오히려 꽤 정확하게 짚어낸 지점입니다.
기억은 왜 지워질까 — 억압과 해리의 작동 방식
극심한 스트레스나 외상을 겪은 뒤 기억이 차단되는 건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설명합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해리는 "정서적 갈등과 외적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법"으로 작동합니다. 의식이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을 아예 접근 불가능한 곳에 밀어 넣는 거예요.
전쟁이나 극한 상황에서 이 현상이 더 자주 나타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서강대 심리학 자료에 따르면 "전시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발병률이 높습니다." 북한 특수 공작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극한의 심리적 압박을 상시로 받아왔다는 설정을 감안하면, 봉제순이 해리성 기억상실에 걸릴 조건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셈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상태 의존적 기억(state-dependent memory)'입니다. 어떤 정보를 학습할 때의 감정 상태와 완전히 다른 상태에 있으면 그 기억을 떠올리기 어렵다는 이론입니다. 북한 공작원 시절의 기억이 극도로 비일상적인 감정 상태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평범한 섬마을 생활 속에서는 그 기억에 접근하기가 더 어렵다는 논리도 성립합니다.
기억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부분이 아마 여기일 겁니다. 봉제순의 기억이 결국 돌아올까, 어떤 계기로 돌아올까.
의학적으로 보면 해리성 기억상실은 회복이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연세대 의과대학 자료에는 "기억상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지만, 회복 또한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치료 방향은 상실된 기억을 회복시키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최면 치료가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이후 심리 치료를 병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회복의 계기가 꼭 치료실 안에서만 오는 건 아닙니다. 감각적 자극 — 과거와 연결된 냄새, 소리, 장소 — 이 기억의 빗장을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봉제순이 몸놀림이 '남다른' 장면이 자꾸 등장하는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신체 기억이 자전적 기억보다 먼저 살아나는 구조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처럼 보여요.
물론 드라마 특유의 과장이 없는 건 아닙니다. 기억상실 드라마의 클리셰처럼 충격 하나로 모든 게 돌아오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겠죠. 실제 임상에서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훨씬 드물고 회복 과정도 길고 복잡한 편입니다.
결국 '오십프로'가 흥미로운 건 설정 자체가 완전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다 사고라는 신체적 외상에 공작원 생활의 심리적 외상이 겹쳐 있고, 몸 기억은 남아 있는데 자전적 기억만 없다는 구조 — 이게 실제 해리성 기억상실의 케이스와 생각보다 맞닿아 있거든요. 다음 회차에서 봉제순이 어떤 계기로 과거를 마주하게 되는지, 그 순간을 심리학 렌즈로 한번 더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