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정리하다가 구석에서 꺼낸 하이탑 스니커즈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산 지 몇 년 됐는데 요즘은 거의 안 꺼냈거든요. 그냥 그때 유행이라서 샀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신발이 왜 이렇게 오래, 그리고 자꾸 돌아오는 걸까요?
하이탑은 원래 농구화였습니다
하이탑 스니커즈의 시작은 코트입니다. 발목을 감싸는 높은 칼라 디자인은 원래 농구 선수들의 발목 부상을 줄이기 위한 기능 설계였습니다. 컨버스 척 테일러 올스타가 그 대표 주자였고, NBA 코트에서 수십 년을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 신발이 거리로 내려오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1970~80년대 뉴욕 브롱크스의 가난한 동네에서 힙합 문화가 태동할 때, 브레이크댄서와 비보이들이 코트용 하이탑을 그대로 신고 거리에서 췄습니다. 기능화가 문화의 일부가 된 순간이죠.
하이탑이 로우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실루엣 자체가 눈에 띈다는 겁니다. 앉아서 다리를 꼬거나 걸을 때 발목이 드러나는 순간, 하이탑은 그냥 신발이 아니라 하나의 스테이트먼트가 됩니다.
Run-DMC가 모든 걸 바꿔놓은 순간
힙합 씬에서 하이탑 스니커즈 이야기를 하면서 Run-DMC를 빼는 건 불가능합니다.
1986년, 이들은 "My Adidas"라는 곡을 냈습니다. 자기가 신는 신발에 대한 노래를 힙합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엔 파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짜 폭발력은 공연장에서 나왔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도중 멤버들이 신발을 들라고 했더니, 수천 명의 관객이 아디다스를 손에 들어 올렸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디다스와 대형 후원 계약을 체결했고, 이건 단순한 브랜드 딜이 아니었습니다. 힙합 아티스트가 스니커즈 브랜드의 얼굴이 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이후 모든 뮤지션-신발 브랜드 협업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Run-DMC는 패션 면에서도 확실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올드스쿨 래퍼들이 디스코 의상의 연장선에 있었다면, 이들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에 끈 없는 스니커즈, 금목걸이라는 거리 문화 그대로의 힙합 패션을 확립했습니다. 신발이 계급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기호가 된 겁니다.
한국에선 빅뱅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해외 힙합 씬의 이야기를 한국으로 가져오면, 빅뱅과 지드래곤이 빠질 수 없습니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빅뱅 멤버들이 무대에서 신던 하이탑 스니커즈 스타일은 그대로 유행이 됐습니다. 지드래곤은 특히 나이키, 컨버스, 아디다스 하이탑을 루즈한 팬츠나 스키니진과 조합하는 방식으로 하이탑 코디 공식을 한국 대중에게 퍼뜨렸습니다. 당시 동대문이나 홍대 거리에 나가면 하이탑과 롤업 팬츠 조합이 하나의 '제복'처럼 퍼져 있던 게 기억납니다.
그 시절 처음 하이탑을 샀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지드래곤 하이탑 스니커즈"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고 사러 갔을 겁니다. 단순히 멋져 보여서가 아니라, 그 신발이 힙합·스트리트 씬과의 연결감을 줬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2026년, 하이탑은 지금 어디쯤 있나
솔직히 2025년은 하이탑 스니커즈에게 좀 어두운 해였습니다. 로우 프로파일, 플랫 솔, 미니멀 실루엣이 런웨이를 지배하면서 하이탑의 볼륨감 있는 칼라가 구식 취급을 받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 들어 흐름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자벨 마랑, 셀린느, 로에베 등에서 하이탑 스타일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특히 복서 슈즈로 불리는 부드러운 하이탑 실루엣이 앤 드멀미스터와 셀린느의 2026 봄/여름 컬렉션에서 동시에 등장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스케이트 무드의 신발이 하이패션과 만나는 것과 비슷한 흐름입니다.
물론 주류 트렌드는 여전히 납작하고 날렵한 로우탑 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트렌드를 쫓는 쪽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쪽에서 보면, 하이탑은 유행이 올 때만 반짝하는 아이템이 아닙니다. 힙합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정체성이 워낙 단단해서, 주류에서 잠시 물러났을 때도 씬 안에서는 계속 신어왔습니다.
신발장에서 꺼내 직접 신어보니
구석에서 꺼낸 하이탑을 다시 신어봤습니다. 착용감 자체는 발목을 살짝 잡아주는 느낌이라 로우탑보다 안정감이 있습니다. 처음 신을 때 발목 부분이 뻑뻑할 수 있는데, 한두 번 신으면 금방 적응됩니다.
코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몇 번 입어보고 느낀 조합은 이렇습니다.
- 와이드 팬츠 + 하이탑: 팬츠 밑단을 살짝 접어올리면 발목 부분이 드러나서 하이탑의 실루엣이 제대로 보입니다.
- 스트레이트 데님 + 하이탑: 클래식하고 가장 실패 없는 조합입니다.
- 오버핏 후드 + 하이탑: 하이탑 스니커즈 힙합 패션의 정석 같은 조합이고, 계절 상관없이 먹힙니다.
의외로 하이탑이 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로우탑보다 발 전체가 좀 더 강조되고, 걸을 때마다 신발이 눈에 들어오는 느낌. 이게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 존재감이 오히려 스트리트 패션 하이탑 추천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신발장에서 꺼낸 이 신발 하나에 수십 년의 문화가 눌려 있었네요. 다음엔 같은 시기 유행했던 다른 스니커즈들도 한번 다시 꺼내봐야겠습니다.